Tik’tak Tik’tak

Viva B Solo Exhibition

2022.11.22-12.04


Gallery VINCI 갤러리빈치




VivaB 

 

비바비(vivaB)는 생명의 의미를 지닌 라틴어원 viva와 Bear 곰의 약자B의 합성어로 비바비는 즉 생명력있는 곰돌이들을 의미합니다. 

곰돌이들은 관람객들에게 위로가, 힘이 되어주는 친구입니다. 

작가는 어린 시절부터 유독 곰인형만을 좋아했고 유별난 사랑으로 수많은 비바비 곰돌이들로 대중들의 마음에 다가갑니다. 


이번 전시는 'Tik'tak Tik'tak' 틱탁 틱탁 시계 소리로 시간의 의미를 담은 전시입니다. 

비바비 친구들은 관객들에게 시간의 의미를 전합니다. 


올해도 마무리되어 가는 시점에서 관람객들은 어떤 한 해를 보냈는지요? 

행복한 순간, 기뻤던 순간 유난히 힘들었던 순간들이  있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해를 보냈어도 모두 소중한 시간이었을 것이고, 더 나은 나를 위한 값진 여행 이었을 거라고 확신합니다.


지금부터는 복잡한 마음을 내려두고 귀여운 비바비 친구들을 보면서 위안과 위로 휴식 즐거움을 느껴봅시다.

 

VivaB loves you.





광활한 궤적이 부유하는 공간

김동형 초대전

Gallery VINCI

2022.10.07 - 10.23





순백의 평면: 광활한 궤적이 부유하는 공간 함 선 미 (예술학, 미술비평)

애써 무언가를 그리고, 애써 무언가를 지우는, 양면의 모순된 방식은 김동형 작품의 근본적인 논리를 대변한다. 

인간도, 사물도 세월 안에서 결국은 변화하는 흐름이 있어 묘한 애틋함을 갖는 것처럼, 작품은 인위적인 것들 사이에서도 인력을 벗어난 자연적 변동에서 비롯한 이질적 상태가 나타나는 지점에 주목하고 있다. 

작가는 쉽사리 지나치고 말지도 모를 사소한 건물 외벽의 일부분을 박제하고, 그 안에서 저절로 새겨진 흔적에 주의를 기울이며 변화와, 공존, 회귀의 연상(聯想)을 담담하게 그려내었다.

김동형의 작업은 건축물의 단면에 관심에 두고 시작한다. 마치 브루탈리즘(brutalism) 건축의 일부분을 잘라낸 듯, 날 것 그대로의 벽면을 떼어낸 것처럼 보이는 익숙한 무늬의 단면이 주를 이루고 있다. 

건물의 외벽과 내벽을 닮은 다양한 그리드(grid)가 정갈하게 배열된 회화 위에는 오랜 건물의 닳은 흔적처럼 부분 부분이 흐려지기도 하고, 

때묻은 먼지가 덕지덕지 눌러 앉은 모습처럼 마티에르가 두드러지기도, 때로는 질서정연한 벽돌이 늘어선 화면 위에 정적을 깨뜨리듯 흡사 금이 간 모습처럼 자유로운 선들이 가로지르기도 한다.


먼저 그의 작품을 처음 마주하면 1970년대 한국 미술의 대표적 경향이었던 단색화가 떠오를 것이다. 그러나 작업은 평면의 장을 넘어 건물 외벽과 같은 직접적인 대상을 거점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차별화된다. 

혹은, 얼핏 1980년대 미국 화단에서 등장한 ‘네오 지오(neo-geo)’ 작가들의 실험성에 좀 더 맞닿아 보이기도 한다. 

하드에지와 같은 추상의 형태를 차용하면서도 당대 문화와 정서적 코드를 비평적으로 은유한 구상적 대상을 교묘히 엮어낸 접근법은 표층적인 연결성이 있다. 하지만 이마저도 작가는 저물어가는 추상회화를 내부로부터 극복하려는 방향성을 보임과 동시에, 그 저변에는 70년대 한국 미술에서 이룩한 본질적 성정을 존중하듯 공존시키며 추상과 구상의 모호한 경계에서 나름의 독자성을 취득하고 있다.

구체적으로 김동형 작가는 주제와 소재, 재료, 제작과정 등 작품 전반에서 양가성의 조율을 꿰어나간다. 작품은 인위적 산물인 건축의 익스테리어(exterior) 위에 개입된 세월의 흉터를 포착했다. 

이로써 주위의 평범한 텍스처를 옮겨낸 장면들은 노장 사상의 영향처럼 세월의 응고 속에서 마치 인간의 인위적 노력이 다시 자연의 이치에 순응하는 과정을 비유적으로 내보이는 것에 관심을 두었다.


또한 재료에서도 건축이나 인테리어에서 흔히 사용하는 인공적 재료인 아크릴릭 필러를 기초로 바르고 그 위에 비교적 자연친화적 성격이 강조되는 한지를 더해가며 재료 이상의 의미를 조우하게 한다. 

이런 화합의 논리들이 심화되어 작업은 형식상의 유사에도 불구하고 회화의 평면성 실험에 집중한 서구의 모노크롬(monochrome) 회화나 미니멀 아트(minimal art)와는 분리된 모습이다. 

오히려 물질적 포화 상태를 지나 전인적 세계관을 근거로 등장한 한국 단색화의 미적 논리들을 계승해나가는 것에 더욱 가까워지는 것이다.

특히 김동형의 작품은 제작 마무리 단계에서 일관되게 하얀 바탕으로 지우는, ‘과정(process)의 예술’을 거듭하고 있다. 작가는 흰 물감을 인고의 과정으로 덮어가며 자연스레 반복적인 선묘나 신체적 제스처를 남긴다. 


부단한 노동 속에서 묵묵하게 선긋기를 반복하는 ‘수행의 예술’을 거치며 작품 속 질감과 텍스처는 내재적 질서를 만들어가고, 이는 정신과 물질의 교차적 단계를 거치며 ‘비물질화’의 차원으로 편입되어 간다.

이처럼 그의 작품에서 순백의 표면으로 되돌리는 과정은 가장 주목할 만한 지점이다. 

동양화를 전공한 작가는 동양화의 대표적 특성이기도 한 여백을, ‘지우는’ 행위를 통해 현대적으로 재편하는데 여기에서 허실합일(虛實合一)의 의도를 읽을 수 있다. 

실제로 작품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한지의 고아한 색상들이 희미하게 배어나, 모든 것을 잠식해버린 백색의 심연은 텅 빈 상태이면서도 모든 것을 아우른 상태임을 실감하게 한다. 


과거 나카하라 유스케(中原佑介)가 1970년대 한국 미술의 특성에서 ‘백색’을 정신적인 상징성의 표현으로 주목한 것처럼, 

순백의 색채는 단순한 물질적 색채를 넘어 비물질적인 순환적 관계성을 자아내고 있다. 

마찬가지로 김동형의 작품에서 새하얗게 감추면서도 드러내는 이중의 작업은 비로소 다시금 원점으로 돌아가는 순환적 삶을 연상시키며 

물질과 정신, 객관과 주관, 동양 철학의 전우주적 시각을 전개하고 때로는 이율배반적이기도 한 이야기들을 화해하게끔 시도하는 것이다.


결국 간결하게 완성한 순백의 평면은 광활한 궤적이 부유하는 공간이 되었다. 추상의 끝나지 않은 게임을 다시금 시도하는 것처럼 보이는 작가는 거시적인 사유들을 미시적인 시선들, 

우리의 익숙한 곳에서 이야기를 꺼내어 친근하게 전한다. 영겁의 세월 속에도 변치 않은 방향으로 흐르는 이치가 존재하듯, 인간의 삶에도 문명 속에도 결국은 거스를 수 없는 자연적 숙명이 있기 마련이다. 

우리의 삶이 받아들여야 할 것들에 초연해지는 과정이듯 작가는 작품 안에서 자리한 수행을 겸허히 이행하며 섭리의 벽을 차분하게 세워간다.

















See the Unseen


Rina Park Solo Exhibition

2022.09.14-.09.29


@gallery.vinci





보이지 않는 것을 향한 붓질, 몰입 그리고 (결국) 존재

나의 작업은 보이지 않는 것이 보이는 것으로 전환되는 순간이다. 

이 한마디를 적게 되기까지 도 수많은 시간이 필요하고 존재했다.

붓질이라는 행위는 다른 어떠한 것을 위해서라기보다 ‘나’를 위해서 시작했다. 

첫 추상 작 업은 억압과 스트레스로부터 비롯된 감정의 해소였고,(다) 단순한 해소로 시작되었던 나의 추상 작업은 내가 살아가는 시간과 그 시간 안에서의 경험이 어우러지며 

내 자아와 점점 일체화 되어갔다. 예술은 삶과 다르지 않게 유기적으로 형성된다. 자연스레 붓질을 하는 행위와 나의 삶은 서로를 위해 존재해야 하는 관계가 되었다.


붓질 행위, 작업의 존재는 ‘나’와 타인과의 관계에서 비롯되는 한계와 그로부터 파생 되는 불편과 슬픔을 극복하기위해 만들어졌다. 

유일무이한 진실된 관계, 변하지않을 관계, 너무나도 외로운, 이 벗어날 수 없는 인간의 본성으로부터 나를 지켜줄 그런 관계를 가진 존재가 필요했다. 

외로우니 그림을 친구로 만들었다. 때로 그림은 나에게 보이지않는 존재에게 올리는 기도가 되었고, 포기하고 싶지만 포기하지 못하는 질긴 사랑같은 존재이기도 했다.

결국 사람이 어려워, 혼자 있는 것이 편했어도 누군가는 필요했다. 

나에게 변하지 않 을 존재, 상처받지 않을 존재, 그 존재가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살아갈 수 있었다. 

존 재. 라고 불리는데 에는 그럴듯한 사유를 붙인 것 이 아닌 정말 나에게는 그림이 존재 했어야만 했기 때문이다. .


내가 하는 행위가 매우 추상적인데 그 행위에서 오는 복잡하고 알기 어려운 모든 것들이 매 순간 계속해서 주어졌다. 

아무도 그 답이 어떤 것이다 라고 알려주지 않아 여러 미술서적들을 찾아 답을 찾아가보려 애쓰기도 했었다. 

결국 그 답은 하루아침에 당장 나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서서히 깨달았다. 

그 답을 찾으려고 존재의 이유와 존재의 실체를 찾으려고 애쓰는 과정 속에서 나는 삶을 배워가고 있는 것 이다. 


하루하루 변모하는 나에게 맞게 그 존재 자체도 변한다. 

나의 완성된 그림들이 그러하다. 아주 솔직하게 그 모습들을 보여주고 있다.

어쩌면 삶은 계속해서 존재의 이유와 가치를 찾아가는 과정이 아닐까. 

나는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주는 존재로서 작업을 받아들였고, 그것은 곧 타인과의 한계를 극복해내는 과정이 되었다. 

작업과의 관계에선 계산이 필요하지 않았고 말을 조심할 필요도 없었으며 감정을 있는 그 대로 드러내는 것이 오히려 더 옳은 존재였다. 

그 존재는 수많은 외부의 자극과 관계 속에서 내 고유의 가치와 개성을 잃지 않도록 유지 시켜주었고 숨막혔던 타인과의 관계에서 숨통이 되어주었다. 

나는 그림의 존재를 통해서 역으로 ‘나’ 라는 사람의 존재를 알아가는 중이다. 


나 의 그림은 보이지않는 것으로, 그 무엇을 그린것인지 알 수 없으나 보이지않는 나의 부분들이 시각화 되어 보여지는 것일 것이다.





-Rina Park-












<삶은 초콜릿 보다 달콤하다>


2022 갤러리빈치 윤지하 초대전 


2022.08.02-14 (11:00-18:00)


Gallery VINCI

서울 서초구 방배로 234-10


02.6402.2780





내가 정말 많이 배운 사람이 몇 있는데. 

내가 깨닫고 얻은 것들은 그들의 부재에서 시작됐다. 


지금의 난 기쁜 일에 그렇게 기뻐하지도, 슬픈 일에 그렇게 슬퍼하지도 않으면서 

여전히 뭐든 할 수 있는 내일이 있다는 것에 감사한다.


사람으로서의 가치와 삶의 의미가. 

사람과 삶 그 자체에 있다는 걸 그때는 왜 몰랐을까? 

하는 후회를 문득문득 한다. 

그런데 또. 

지금의 뒤늦은 깨달음을 위해 여전히 적응 안 되는 '안녕'은 불가피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 

가끔 그립고 슬프지만, '있음'은 '없음'에서부터 나온다는 말이 정말 맞는지도 모르겠다. 


다음 날 아침에 차가운 라떼를 마실 수 있고, 다음 날 오후에 수업에 참여할 수 있고, 다음 날 저녁에 뭘 먹을까 고민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모두 감사한 일인데 말이다. 


너무나 우연했던 그들과의 이별은 삶과 존재에 대한 나의 생각을 바꾸어 놓았다.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이 세상에서 인간이 해야 할 것은 살아있다는 '나'의 존재에 대한 명징한 의식을 가지고 삶을 가꿔나가는 것이었다. 

인생은 허무함 투성이라 살 가치가 없는 것이 아니었다. 삶은 확실한 하나의 가치로 제한되어있지 않기에 되려 한계 없는 막연함이자 무한함이었고, 무상함 아닌 무성함이었다. 

확실한 무언가를 해야만 또 누군가 곁에 있어야만 인간으로서의 가치가 생기고, 남겨놓은 족적이 영원해야만 삶의 가치가 생긴다고 생각했던 나의 생각은 너무나도 어린 것이었다. 

죽음에 대한 경험은 허무가 삶에 대한 사력으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나는‘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허무에 대한 수용적 태도가 아닌 능동적 자세를 지닌 사람이 되었다. 

작고에 대한 슬픔과 이별에 대한 후련함은 나를 더욱 더 허무에 반항하게 했다. 삶에 애착을 가지게 했다. 

허무에 잠식된 인간의 자화상을 그리던 나는 이제 삶에의 의지를 느끼는 인간의 자화상을 그린다. 


지금의 나에게 허무란 삶에 대한 의지이자 사력이다. 

‘인간의 삶은 이렇게 한낱 꿈일 뿐이야, 허탈하고 무상하지’가 아닌‘인생이라는 한낱 꿈에서 깨어나기 전 나의 모든 것을 다해 이 시간을 충만함으로 채워나가야지, 후회하지 않도록’이라는 인간의 의지와 열망이 그것이다. 


삶은 더 이상 나를 짓누르는 아득함이 아니다. 무엇이든 할 수 있는 무한함의 시공간이다. 나는 이 시공에서 내가 살아있다는 움직임을 인지하며 나 자신과 대면한다. 

나는 하나뿐인 나의 삶에 충실하기 위해 더 이상 확실함을 쫓지 않으며 가치를 정해놓지 않는다. 

나는 이러한‘삶에의 의지’와‘무성한 가치',‘무한함’으로서의 허무를 즉흥적이고 직관적으로 구현하며, 허무에 반항하는 인간의 모습을 연출적으로 표현한다. 

 

나의 오늘은 누군가가 간절히 바라고 원하던 내일일 수 있고 내가 살아갈 시간들은 끝이 있기에, 이유를 모르기에 더더욱 오늘 하루만 살 것처럼 사는것. 

과거의 시간에 갇힌 채 미래의 어느 순간을 위해서가 아닌, 지금 현재를 기꺼이 살아내는 인간의 반항. 이것이 내가 말하는 허무의 페르소나이다.



- 윤지하 작가노트 중.. -